[추억의 LP여행] <영 사운드> 안치행

공연사업에 남다른 수완 불멸의 히트곡
1972년 구성지고 경쾌한 노래들로 젊은 영혼들을 사로 잡았던 6인조 록 그룹 영 사운드가 등장했다. 대표곡인 ‘등불’과 ‘달무리’는 30여 년의 세월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한국 록의 불멸의 히트 넘버로 자리잡고 있다. 외국곡 연주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 영 사운드는 록 발라드 계열의 창작곡을 위주로 활동을 했던 중요 그룹이다.
리더는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조용필, 윤수일, 최헌, 주현미, 문희옥, 박남정 등 한국대중가요사에 걸출했던 스타들을 키워낸 음반제작자 겸 작곡가인 안치행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전남 진도 옆의 작은 섬인 가사도에서 소장을 했던 부친 안보만 씨와 모친 장말진 씨의 3남 1녀 중 3남으로 1942년 1월 30일 태어났다.
6살 때 목포로 나와 가사도의 기억은 없다. 이후 초등학교 3학년 때 익산으로 이사를 해 이리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해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공부에 취미를 잃었던 그는 30살이 넘는 학생들이 즐비했던 이리 남성야간중학에 1회로 들어 갔다. 정학 중이던 이리농고 2학년 때 황해악극단이 단원실습생을 모집을 하자 집에서 운영했던 제과점에서 돈을 훔쳐 악극단을 따라 가출을 했다.
여수, 부산을 돌아다니다 돈만 뺏기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 딱지놀이를 하며 기타통에 딱지를 넣는 것을 보고 기타를 빵과 바꿨다. 지나가는 사람이 연주해 준 ‘타향살이’에 마음을 빼앗기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때부터 기타책을 구해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또 이리 원광대 관현악단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이후 7개월 간 기타를 배 위에 올려놓고 잘 정도로 연습을 하자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방 하나를 얻어 악기점에서 기타를 빌려다 기타학원을 차렸다.
책가방을 들고다닌 적이 없던 문제아였던 그는 5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돼지를 몰고 제과점 앞을 지나가는 담임선생님과 “대학을 안 갈거니 오전수업만 하기”로 합의했던 것. 그는 이 때부터 타고난 사업적 수완을 발휘했다. 전북 이리, 군산을 비롯해 각 읍 면에서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며 다녔다. 대회에 참가하는 가수들에게 참가비로 5백환을 받고 입상을 하면 기타 한 대를 주는 식이었다. 추석 때는 읍 대항 노래자랑대회를 열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학비를 모아 김제에 천막극장을 차린 뒤 영화 ‘홀쭉이와 뚱뚱이’의 필름을 걸어봤지만 쫄딱 망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기타를 정식으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66년에 상경해 찾아갔던 곳은 을지로에 있던 이인성 음악학원. 이인성은 60년대의 최고 기타리스트. 처음에는 그를 받아 주지않으려 했지만 테스트 후 ‘서영춘과 그 일행’이 활약하던 악극단 20세기 컨츄리 쇼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악극단 기타리스트가 되어 태평, 노벨극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스타 뒤에 가려져 기타만 치는 현실이 싫어 그만 두고 고교생 최헌, 펄 씨스터즈 자매가 노래를 배우고 있던 이인성학원의 조교가 되었다.
당시는 비틀즈열풍시대. 별명이 조로였던 친구가 록 그룹 결성을 제안해 베이스 기타 오덕기와 함께 3인조를 결성했다. 남산 팔각정 근처에 방을 얻어 녹음기로 팝송을 따며 2달 간 레퍼토리 연습을 했다. 보컬인 조로가 그만두자 드러머와 보컬 유영춘 올갠 장현종 3명을 추가해 5인조 록 그룹 ‘실버 코인스’를 결성해 미8군 쇼업체 화양과 9만원에 계약을 했다. 67년의 일이다.
오디션 결과는 최고등급인 더블 A. 미8군 인기가수 김계자를 합류시키고 무용수를 영입해 패키지 쇼 팀을 구성해 전국의 미군기지를 돌았다. 45분짜리 쇼단을 구성했던 당시 안치행은 기타 솔로 패키지 쇼에서 터키행진곡을 연주해 미군들에게 “웨스 몽고메리 스타일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불릴만큼 인기를 모았다.
67년 12월 30일 동두천 공연 후 귀경길에 사고가 났다. 술을 마셨던 미군 운전수가 눈길에 세 번 충돌을 해 안치행은 이마를 14바늘을 꿰맸고 조수 1명이 죽는 대형사고였다. 5년 정도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하다 1970년 일반 무대인 조선호텔 옥상에 생긴 나이트클럽에 출연이 성사되었다. 팀 이름도 영 사운드로 변경했고 멤버 교체도 있었다. 리드 기타 안치행, 보컬 유영춘, 키보드 장현종, 올갠 장성현에 탈퇴한 베이스 오덕기 대신 장대현과 드럼 박동수가 들어 왔다.
라틴 계열의 조용한 음악을 추구했던 영 사운드의 대표곡 ‘달무리’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던 동양방송의 음악프로 ‘신가요 박람회’ 입상곡이었다. 응모를 통해 당선된 작사가 김주명의 가사에 작곡가 세 명이 경합해서 입상곡을 결정했던 독특한 프로그램이었다. 71년 포 시즌에서 사회를 본 박광희 동양방송 PD의 소개로 참여한 안치행이 최초로 작곡한 곡은 ‘달무리’, 두 번째 ‘고향의 벗’, 세 번째가 ‘등불’이었다.
72년 명동장의 연예 상무 이종범과 인연을 맺고 명동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생음악 살롱 포 시즌 양 쪽에서 활동을 했다.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아지자 1972년 오아시스에서 데뷔음반 ‘히트 퍼레이드’를 발표했다. 이어서 73년에는 '장미리'와 '영 사운드'의 스플릿 음반을 성음사에서 발매했다. 이후 영 사운드는 동양방송의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밴드가 되었다. 73년부터 74년까지 방영되었던 그 프로는 쇼 연출의 귀재였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을 맡아 젊은 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프로그램. MC는 포크가수 서유석과 양희은이었다.

70년대 가요의 히트 제조기 불경음반은 또다른 음악실험

1974년 영 사운드는 플루트 주자 왕준기의 가세로 6인조로 거듭났다. 멤버들은 모두 독특한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리더 안치행은 무대뽀 성격 때문에 ‘돌팔이’, 올갠 장성현은 대학생같아 보인다고 ‘학삐리’, 리드 싱어 유영춘은 나이보다 늙어보여 ‘애늙은이’, 베이스 김희조는 태권도 유단자라 ‘검은 띠’, 풀룻 왕준기는 성을 따 ‘왕퉁소’라 불렸다.
다운타운에서는 제법 인기 그룹이었지만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킹 박과 작업한 75년 5월 영 사운드 1집부터였다. 이 음반은 76년과 10년이 지난 84년에도 재발매가 된 빅 히트 앨범. 하지만 2집 발표 후인 75년 9월 멤버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치행과 박동수 김희조는 그대로 남고 유영춘, 장성현, 왕준기는 ‘여섯마당’이란 팀을 결성해 독립했다. 당시는 대마초파동 후 공륜의 곡 심사 강화로 음반 발표가 힘겨웠던 가요계의 침체기였다. 67년 창단 이래 돈독한 우애를 다져왔던 팀의 양분 소식에 록 그룹계는 체질개선 바람에 휩싸였다.
미 ‘정성조와 메신저스’는 교체를 했고 ‘검은 나비’, ‘조갑출과 25시’ 등도 멤버 교체의 진통을 겪었다. 70년부터 조선호텔 캘럭시, 라이온스와 오비스 케빈, 포 시즌스를 주 무대로 삼았던 ‘영 사운드’는 활동을 중단했다. 안치행은 음악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팀 해체 후 안치행은 퍼시픽호텔의 무겐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어느 날 보사부 직원인 후배가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퍼시픽호텔에 숨어있던 이태현을 잡으러 왔다. 그 때 제작자인 킹 박이 찾아와 이태현에게 월급 6만원중 3만원을 집어던지듯 주었다.
음악친구의 자존심 상하는 모습을 보자 오기가 발동한 안치행은 500만원을 투자해 1976년 신중현의‘더 멘’과 ‘검은 나비’를 거친 김기표, 이태현과 함께 안타프로덕션을 창립했다. 그룹 출신 음악인이 창립한 최초의 프로덕션 탄생이었다. 하지만 곡을 부탁한 작곡가 안길웅이 몇 달을 허송세월하자 직접 ‘오동잎’ 등을 작곡했다.
헌과 호랑나비 음반은 제작자로 변신한 그의 첫 작품이었다. 76년 기존 멤버가 아닌 리드 싱어 서정호, 드럼 박훈, 올갠 이정웅, 리드 기타 유현상, 베이스 기타 신병하, 여성보컬 윤시내의 6인조가 영 사운드의 그룹명을 이어받았다. 생음악 살롱 포시즌이 주 무대였던 이들은 그룹 포 시즌으로 개명을 해 음반을 발표했다.
킹 박과 함께 제작한 조용필, 영 사운드 스필릿 음반은 훗날 국민가수로 등극할 조용필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안치행의 오기가 없었다면 이 음반은 세상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어느날 조용필의 매니저였던 축구선수 이회택이 찾아와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킹 박에게 제작을 의뢰했지만 그는 트레이드인 털 하나를 뜯으며“너무 일본놈 스타일이라 안된다”고 했다. 사실 킹 박은 연주자였던 안치행이 제작자가 된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이회택과 약속을 했기에 음반 제작을 강행했다.
당시는 일본 조총련 동포들의 고국방문이 핫 이슈였던 시절. 타이틀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 가사를 시류에 맞게 수정하고 영 사운드의 노래를 넣어 2가지 재킷으로 음반을 제작했다. 홍보도 못했던 이 앨범은 부산을 시작으로 1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신감을 얻은 안치행은 77년 장충체육관에서 입장료 490원의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를 열었다. 대마초에 연루된 조용필의 마지막 무대였다. 다음은 록 그룹 골든 그레입스의 음반. 멤버들은 공전의 히트곡이 될 트로트풍의‘사랑만은 않겠어요’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안치행은 멤버들의 반대에도 리드 기타 겸 보컬이 된 윤수일을 앞세워‘윤수일과 솜사탕’으로 그룹명을 바꿔 빅 히트를 터트렸다.
78년은 안타프로덕션 소속 가수들의 천하. 인순이의 희자매가 중창부문상을 수상하고 최헌은 MBC,TBC 양 방송의 가수왕을 윤수일은 신인가수상, 안치행도‘사랑만은 않겠어요'로 MBC 최고 인기작곡상을 수상했다. 79년 공연 중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극장의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도 그의 작품이었다. 최헌, 조용필, 윤수일 트로이카 외에도 서유석의 ‘구름나그네’, 김 트리오의 ‘연안부두’,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 윤민호의 ‘연상의 여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나훈아의 ‘영동부르스’, 희자매의 ‘실버들’, 문희옥의 ‘사투리 메들리’ 등은 안타제조기 안치행의 작품이었다.
안타프로덕션은 이름처럼 연속안타를 쳐, 75년부터 80년대 내내 대중가요계를 주도하는 제작자로 군림했다. 79년 안치행의 주선으로 유영춘이 리더가 되어 유영준과 영 사운드가 재결성되어 79년, 80년 2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최근에도 김상희의 '데킬라 부르스', 최헌의 '돈아 돈아', 윤희상의 '포옹' 등을 작곡한 그는 1998년부터 상호를 사운드 코리아로 변경해 운영하고 있다.
2004년에는 신보 ‘심경’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반야심경 등 불교경전을 드럼, 기타에 목탁 소리를 뒤섞어 빠른 비트의 경쾌한 힙합음악으로 직접 노래도 불렀던 것.“이제 음반 제작보다는 불교음악을 젊은이들에게 알리는 일에 매진하렵니다.” 500여 곡을 작곡한 그는 “창작은 마음을 파는 것”이라며 “불교음악은 궁중음악 스타일이라 일반 대중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면 합창도 할 수 있게 심경을 편곡해 놓았다”며 향후 음악탐구의 방향을 슬쩍 들려준다. 최초의 힙합 불경음반에 대해 젊은 신도는 환영을, 그러나 일부 스님들은 비난을 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그의 신보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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