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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에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번

Piano Sonata No. 1 in F minor, Op. 2/1 Wilhelm Backhaus, Piano 제1악장. Allegro 제2악장 Adagio 제3악장 Menuetto , Trio-Allegretto 제4악장 Prestissimo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소나티네를 포함하여 전부 36곡이 남아 있고 그밖에 1곡의 미완성 소나티네가 있다. 또 별도로 2곡(G장조. F장조)의 간단한 소나타(Leichte Sonaten)가 있는데 이것은 '베에토벤' 자작의 것인지의 여부가 의문시되고 있다. 이상의 것 중에서 중요산 것은 작품 번호가 붙어 있는 소나타이고 그밖에, 말하자면 3곡의 소위 선제후(選帝候 소나타)등은 '베에토벤'의 소년 시절을 알 수 있을 뿐더러 흥미 진진한 작품이지만 예술적으로는 32곡의 소나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훌륭한 음악가로서의 '베에토벤'의 업적은 이 [작품2]의 소나타에서 시작하여 [작품111]의 소나타까지 계속되는데 이것은 피아노 음악의 크나큰 발전사(發展史)를 형성했음과 동시에 '베에토벤' 생애의 진수를 캐내어 그의 표현 형태의 변화가 어떠한 것인가의 척도로 되어있다.. Piano Sonata No. 1 in F minor, Op. 2/1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no.1(op.2, no.1) 작품 2의 세 소나타는 스승이었던 하이든에게 헌정되고... 1795년 8월.. 하이든이 영국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리히놉스키 후작의 저택에서.. 베토벤 스스로가 이 세 곡을 직접 연주하여 들려 주었다... 하이든뿐만 아니라.. 대 작곡가의 스승, 알브레히쓰베르거(John Georg Albrechtsberger 1936 - 1809) 셍크(Johann Schenk), 살리에르(Salieri Antonio 1750 - 1809)등등.. 베토벤은 어떤 스승의 가르침도 충실히 이행했다고 말할 순 없다... 배울만한 것들은... 모조리 흡수했고.. 그것이 베토벤에...

베에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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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oleon Bonaparte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Major Op.73 "Emperor" 제 1 악장 2 악장 제 3악장 1808년경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된 듯하다.  나폴레옹군이 빈의 것리에 침입해 온 것이 1809년 5월이므로 포탄 속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베에토벤은「내가 대위법과 같은 정도로 전술에 관해서 알고 있다면 그들이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는데」라고 화를 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곡을 베에토벤의 분노에서 생겨난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초연은 1811년 11월 28일에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의 음악회에서 행해졌다. 피아노 독주는 프리드리히 시나이더, 지휘는 쉴쯔가 담당했다. 이 초연은 대성공이어서 당시의 신문은 「이 곡은 모든 협주곡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효과적인데다 또한 어려운 곡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12년 2월에 행해졌던 빈의 초연에서는 베에토벤의 제자이며 교칙본으로 이름 높은 체르니(1791~1857)가 독주했으나, 평판이 나빠서 이후 베에토벤의 생전에는 전곡의 연주가 되지 않았다. 1811년에 출판되어 「제 4협주곡」과 마찬가지로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악기 편성은 독주 피아노,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펌) 자료출처 Swan

산울림 모음 27곡

01.청춘 - 산울림 02.내게 사랑은 너무 써 - 산울림 03.창문넘어 어렴풋이 옛생각이나겠지요-산울림 04.어느 산골소녀의 사랑이야기 - 산울림 05.그대 떠나는날에 비가오는가 - 산울림 06.사랑하는사람아 - 산울림 07.내마음의 주단을 깔고 - 산울림 08.빨간풍선 - 산울림 09.길을 걸었지 - 산울림 10.아니벌써 - 산울림 11.못잊어 - 산울림 12.찻잔 - 산울림 13.둘이서 - 산울림 14.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 산울림 15.한동안 뜸했었지 - 산울림 16.나 어떡해 - 산울림 17.문 좀 열어줘 - 산울림 18.귀여운 소녀 - 산울림 19.가지마오 - 산울림 20.개구장이 - 산울림 21.꼬마야 - 산울림 22.너의 의미 - 산울림 23.안녕 - 산울림 24.가을에 오시나요 - 산울림 25.독백 - 산울림 26.골목길 - 산울림 27.산할아버지 - 산울림

♬ 내가 만일 - 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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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일 - 안치환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드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래하겠소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나 행복하게 하고 싶어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그대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아니 워우워 이런 나의 마음을 내가 만일 구름이라면 그댈 위해 비가되겠소 더운 여름날에 소나기처럼 나 시원하게 내리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댈 위해 되고싶어 오늘처럼 우리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기쁨인지 세상의 그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알고있니 워우워 이런 나의마음을 워우워 이런 나의마음을

박강성 노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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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 추억의 LP 여행

순수한 음악적 감성 파격으로 가요계 강타 록 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아마추어적 풋풋한 감성이 짙게 배인 '아니 벌써' 등이 수록된 데뷔 음반은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 변동을 몰고 왔다. 독특한 사운드도 신선했지만, 순수하고 맑은 감수성과 실험정신이 듬뿍 담겨 있었다. 분명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음악이었다. 일본에서도 산울림의 음악만은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해주고 있을 만큼. 산울림은 서울대 농대 71학년인 큰 형 김창완(1954년생), 서울대 농대 75학년인 둘째 김창훈(1956년), 고려대 공대출신 막내 김창익(1958년생)으로 구성된 3형제 라인업이었다. 리더는 큰 형인 김창완. 수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68년 중앙고 시절부터 75년 군대 제대까지 CCR, 아이언 버터플라이, 너바다 등 외국의 록이나 팝에 심취했었다. 국내 가수 중에는 신중현, 김추자, 펄 시스터즈의 노래를 좋아했다. "음악학원에 다닌 적도 없고, 대학교 1학년 때 동네 고물상에서 클래식 기타 교본과 1,500원짜리 세고비아 통기타 2대를 사서 교본의 첫 장에 나오는 D코드를 잡으며 30분 동안 쳤어요. 그 소리가 참 아름다워 음악을 하게 되었지요" 대학 2학년 때 여자 친구에게 헌정하는 소품을 만들기도 했다. 둘째 창훈은 당산중 시절, 음악 선생님을 통해 클래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형의 영향으로 용산고에 진학하면서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잠시 불었다. 대학에서는 서울대 농대 캠퍼스 록 그룹 샌드 패블즈의 5기 멤버가 되어 기타를 연주했다. 타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막내 창익은 처음에 드럼을 살 돈이 없어 노트와 냄비 뚜껑부터 숟가락 통까지 아무거나 두드리며 연습을 했다. 이에 집안에서는 입학 선물로 드럼 세트, 앰프 두 대, 기타 두 대를 사 주었다. 왕십리에 가서 계란 판을 사와서 방에다 붙여 놓고 학교를 마치는 주말마다 모여 연주를 했다. 그들의 집이었던 동작구 흑석2동은 동네가 시끌시끌했다. 기타 사자마자 그 다음날부터 작곡...

김상국 - 추억의 LP 여행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 부산의 명물서 전국구 스타로 60-70년대 연예계의 ‘악동’으로 불린 가수 겸 영화배우 김상국. 진한 허스키 보컬로 ‘불나비’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송아지’등 재즈에서 민요, 동요까지 폭 넓은 레퍼토리를 놀라운 호소력으로 소화했던 그는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울부짖는 듯 했던 그의 노래와 세상 근심을 날려버리듯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코믹은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쇼 무대의 명물’이라 불리게 했다. 그는 뜨거운 열정과 톡톡 튀는 개성으로 대중에게 강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괴물 엔터테이너’였다. 1934년 1월 24일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그는 몸은 왜소했지만 총명했다. 어린시절 그의 보물 1호는 일본군인이 쓰던 찌그러진 신호나팔 악기. 어른들도 놀랠 정도로 나팔을 멋지게 불렀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 그래서 10여명의 동네 개구쟁이들과 모여 ‘만주로 달아나자’는 엉뚱한 모의를 하고 잡혔을 때를 위해 일본 헌병을 칼로 찔러 죽이는 연습까지 했을 정도. 경남중학에 입학하던 해에 지나가는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어른들이 부르는 도라지타령에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을 맞았다. 경남중학 밴드부에 들어간 그는 드럼, 트럼펫, 알토 색스폰 등 다양한 악기를 접했다. 끼가 많았던 그는 기계체조와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도 곧 잘 했고 특히 영어성적이 뛰어났었다. 중학 4학년 때인 16살 때, 6.26전쟁이 터졌다. 당시 부산 범일동 그의 집 앞 사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탱크를 앞세운 미군들의 행군 대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다녔다. 어느 날, 친구들과 거리에 나가 구경을 하던 중 미군 탱크가 김상국 앞에 멈춰서 길을 물어왔다.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주저 없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지 미군은 그를 탱크에 싣고 미군부대로 데려갔다. 곧바로 미군부대 나이트클럽으로 인계된 그는 소년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그...

김광석 - 추억의 LP 여행

[주간한국 2004.07.02] 수줍은 듯한 미소가 근사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그는 사실 스타가 될만한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TV 등 주류무대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았지만 발표하는 앨범마다 소리 없이 20~30만장이 팔려나간 언더그라운드 인기 가수였다. ‘ 너무 우울하다’는 이유로한 때는 방송 금지 되었던 그의 노래 ‘ 이등병의 편지’는 1980년대 이후에 군대에 다녀온 젊은 청춘은 한번쯤은 노래했던 그의 대표곡이다. 그는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첫 가수이다.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5살때인 68년에 서울로 올라와 창신 초등학교를 다녔다. 왜소한 체격이라 ‘반토막’, ‘파김치’란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IQ 130의 영특한 아이였다. 76년 경희중에 입학해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를 읽게 되었다. 79년 대광고에 입학해합창단원이 되었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면서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친구에게서선물 받은 민중 가요집 ‘젊은 예수’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이란 노래를부르다가 울었다. “ 당시 우연히 접한 한돌, 김민기씨등의 노래를 듣고감동을 받고 노래 서클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래서 3학년이 된 84년 서울지역대학생의 노래연합서클인 ‘ 연합메아리’의 멤버가 되어 김민기의 ‘ 개똥이’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김민기의 주도로 대학가 노래 운동의 주역들이 규합하여 만든 ‘ 노래를 찾는사람들(노찾사)’의 창단 멤버가 되어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민중 가수가된 것이다. 이후 85년 1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큰 형이 사망해 6개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는 노래 인생을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87년...

음악 사이트

YouTube YouTube 김광석 둥근소리 김광석을 추억하는 이들의 작은 모임터 김광석과 음악세계 이승철 이승철공식홈피

그대여 - 박강성

저 멀리 멀어지는 그대 모습에 비춰진 초라한 내 그림자 이제는 지워버릴 그대의 눈가에 이슬 맺쳐있네 흐르는 세월처럼 사랑까지도 그렇게 보내고 돌라서면 비로소 만나지는 진실이 내 앞에 흩어지고 있네 * 그대여 말없이 돌아서는 그대여 이제는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조각난 우리의 지난 날의 일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네 그대여 그대여 할 말도 너무 많았는데 * 그대여 말없이 돌아서는 그대여 이제는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조각난 우리의 지난 날의 일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네 그대여 그대여 할 말도 너무 많았는데

소리새 - 그대 그리고 나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산울림 -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은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금만 길 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금만 길 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산울림 - 그대떠나는날에비가오는가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네 슬픔은 오늘 이야기 아니오 두고두고 긴 눈물이 내리리니 잡은 손이 젖어 가면 헤어지나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저무도록 긴 비가 오는가 그대 떠나는 날에 잎이 지는가 과거는 내게로 돌아서 향기를 뿌리고 있네 추억은 지난 이야기 아니오 두고두고 그 모습이 새로우리 그때 부른 사랑노랜 이별이었나 그대 떠나는 날에 잎이 지는가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네

노고지리 - 찻잔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이종용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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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난 낙엽지는 소리에 /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살아버린 / 그런 세월을 느낀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우-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우-

이종용 - 겨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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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 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런 당신은 / 눈 처럼 맑은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 언제나 맑고 깨끗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 눈 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 언제나 맑고 깨끗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 눈 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생일 축하합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 당신의 생일을 Happy birthday to you

이종용 -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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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지던 그 숲속에 파란 바닷가에 / 떨리던 손 잡아주던 너 별빛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하며 / 나를 위해 기도 하던 너 웃음지며 눈 감은 너 내곁을 떠난 뒤 외로운 짚시처럼 / 밤을 태워버린 숱한 나날들 오늘도 추억속에 맴돌다 지쳐버린 / 창백한 나의 넋 바람에 실려가고 빗소리에 몰리는 / 잊어버린 너의 목소리 부서지는 머리결을 은빛처럼 날리우고 / 되돌아선 너의 옛모습 웃음지며 눈 감은 너 내곁을 떠난 뒤 외로운 짚시처럼 / 밤을 태워버린 숱한 나날들 오늘도 추억속에 맴돌다 지쳐버린 / 창백한 나의 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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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음악파일 형식은 wma입니다. 간간히 mp3나 asf형식도 있습니다만 십중팔구는 wma파일입니다. wma파일은 mp3파일과 비교해 음질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지만 용량에서는 많게는 1/3정도 까지로 줄여 놓은 파일입니다. 귀가 민감하시지 않은 분이라면 충분히 wma파일로도 음악을 즐기실수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는 첨부파일에 음원도 같이 첨부하였으나, 현재는 번거롭기도 하고 저작권 단속이 심해서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 다운로드 하는 방법이 있지요... 3가지 방법이 있는데.. 다운로드 하는 방법은 미디어 플레이어 상에서 마우스 우클릭하면 속성(R)이라는 메뉴가 나오고 이것을 누르면 조그마한 새창이 뜨면서 wma파일의 주소가 담긴 "위치"라는 탭이 나옵니다. 그곳에 마우스를 끌어 주소를 복사하시고 인터넷 익스플로어러 주소창에 그대로 붙여넣기 하시고 엔터를 치면 다운로드 창이 나옵니다. 예전에 작성한 포스팅의 경우 미디어 플레이어를 조그맣게 해놓거나, 마우스 우클릭이 안되는 미디어 플레이어가 있는데, 이럴때는 미디어 플레이어 말고 다른곳에 마우스 커서를 위치해놓고 우클릭하시면 소스보기(V)라는 메뉴가 나오는데 이것을 누르면 메모장이 뜨면서 그 안에 알수없는 영어로 작성된것들이 보일것입니다. 그럼 메모장에서 Ctrl+F키를 동시에 누르면 '찾기'창이 나옵니다. 찾을 내용에 wma(혹은 mp3, asf)를 입력하고 엔터를 치시면 wma의 주소가 있는 곳으로 마우스가 이동합니다. 그럼 그 주변에 http://로 시작되는 주소부터 마우스를 끌어 ""따옴표가 끝나는 곳까지 복사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익스플로어러 주소창에 복사한 주소를 붙여넣고 엔터를 치시면 역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실수 있습니다. 인터넷 임시파일을 저장하는 폴더인 서라는 폴더가 있는데, 이곳에는 좀전에 로딩되었던 이미지,음악파일,동영상등이 잠시동안 저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셨으면 바로 이 폴더로 찾아...

조용필 Best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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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역사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결성되어 5년 가량을 부산 등지에서 활동해오던 그룹 '조용필과 그림자'는 1979년 대마초 연예인 활동 규제 철폐와 더불어 밴드 이름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시대를 기약한다. 이후 1980년 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조용필은 그 해 9월, 통상적으로 위대한 탄생 제1기로 알려져 있는 곽경욱(리드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키보드), 이건태(드럼) 라인업을 출범시킨다. 이 위대한 탄생 1기 멤버들은 조용필의 초기 명반으로 손꼽히는 3집과 4집 앨범의 음악들을 함께 하게 된다. 또한 객원멤버이기는 했지만 이호준이 공연마다 함께하면서 더욱 풍성한 음악을 선사하였다. 1983년 4월, 일본 NHK홀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위대한 탄생을 프로젝트 그룹형식의 백밴드로 재편하면서 송홍섭(베이스), 이호준(키보드), 변성룡(키보드), 김석규(기타),백천남(드럼), 유상윤(색소폰)등을 맞이하였다. 이들 2기 위대한 탄생의 연주는 외국공연에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01. 킬리만자로의 표범 - 조용필                        12. 기다리는 아픔 - 조용필                               23. 비련 - 조용필 02. 그대 발길이 머무는곳에 - 조용필             ...

정원 - 미워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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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않으리 / 정원 목숨 걸고 쌓올린 사나이의 첫사랑 그라스에 아롱진 그님의 얼굴 피보다 진한사랑 여자는 모르리라 눈물을 삼키며 미워하지 않으리 피에 맺힌 애원도 몸부림을 쳐바도 떠나버린 그님을 아쉬울소냐 사나이 붉은순정 여자는 모르리라 입술을 깨물며 미워하지 않으리

[펌] 정원 - 추억의 LP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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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기사입력 2004-12-17 10:18 1960년대 극장 쇼의 슈퍼 스타 정원. 그는 방송이 아닌 라이브 무대와 음반만으로 정상의 인기를 누린 특이한 가수였다. 지금도 올드 팬들의 애청곡인 대표곡 ‘허무한 마음’, ‘미워하지 않으리’, ‘내 청춘’ 등을 비롯해 그가 남긴 600여곡 중 방송 차트에 올랐던 곡은 한 곡도 없다. 이름보다는 노래로 더 알려진 그는 원조 언더 그라운드 가수로 불릴만 하다. 방송 개국 러쉬가 이뤄졌던 60년대는 여전히 극장쇼 무대의 비중이 방송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녔었다. 패티김, 이미자, 박재란, 최숙자, 최희준, 김상희는 말이 필요 없는 60년대 최고 스타였지만, 극장쇼 무대의 스타는 그들 외에도 정원, 쟈니리, 이금희가 공존했다. 주류 방송 가수가 아닌 정원이 60년대 각종 신문, 잡지와 전국의 방송국에서 50여개의 가요상을 휩쓴 최고 가수로 군림했던 것은 그 같은 시스템때문. 세월과 함께 이름은 잊혀졌지만 정원의 음반들은 마니아들에겐 여전히 수집 아이템으로 꼽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정원의 본명은 황정원. 일본 유학을 다녀와 외자청(현 조달청) 공무원을 지낸 부친 황종호씨와 원산의 명문 루시고녀 출신인 모친 최복녀씨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1941년 2월 23일에 금강산 마을로 유명한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장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말을 타고 사냥과 음악을 즐겼던 호탕한 분이셨고 모친은 농구 선수 출신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축음기로 일본 노래들을 많이 들었다. 쾌할한 성격의 그는 전쟁 놀이를 좋아했다. 해방 후 대지주였던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몰려 서울 신설동으로 이사를 해 동신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때 6ㆍ25사변이 터져 경기도 가평으로 피난을 갔다. 1ㆍ4 후퇴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민 수용소의 수정국민학교에 다녔다. 이후 공무원 부친의 잦은 전근으로 광주 중앙국민학교를 거쳐 여수 동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무려 6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지만 우등상을 받고 축구 선수로도 활약을 했던 모범생이었...

정원 - 가버린 사랑

가버린 사랑 / 정원 사랑만 묻어 놓고 떠나가 버린 사랑 / 나는 어이 살라고 돌아 올 줄을 모~르는가 * 낙엽처럼 유성이 떨어져 간 / 그날밤 몸부림을 치면서 울었던 상처만 남겨 놓고 다시 올 줄 모르네 / 상처만 남겨 놓고 떠나 가버린 무정한 사람

정원 - 내 청춘

내 청춘 / 정원 * 내 청춘 버림받고 흐느껴 울었을 때 / 괴로운 내 마음 죽고 싶어라 내 사랑 버림받고 흐느껴 울었을 때 / 무심한 이 마음 흐느껴 울었다 눈보라 치는 밤 외로이 걸으며 지나간 추억을 나혼자 괴로운 이맘을 달래 보아도 시원치 않더라 사랑의 상처가

정원 - 울지 않으리

울지 않으리 / 정원 사랑하지 않아도 울지 않으리 날 미워 한대도 울지 않으리 캄캄한 밤에는 촛불 태우며 쓰디 쓴 그사람을 원망않겠네 사랑하지 않아도 울지 않으리 날 미워 한대도 울지 않으리 (한마디만 해보자~ 안개 자욱한 밤~ 그날을 잊었다해도 좋다 하지만 너는 내가 먼저 버렸다면 그때 너는 어떻게 하겠니?) 사랑하지 않아도 울지 않으리 날 미워 한대도 울지 않으리

정원 - 못 잊을건 정

못 잊을건 정 / 정원 당신을 보내 놓고 무거운 발길은 / 돌아 갈 길을 잊어 버렸나 안개속을 걷는다 마음이 그리워도 잊어야 할까요? 돌아올 수 없을까? 돌아 올 수 없을까? / 못 잊을 건 정 당신을 보내 놓고 무거운 발길은 / 돌아 갈 길을 잊어 버렸나 안개속을 걷는다 그 모습 그리워도 지워야 할까요? 잊어야 할까요? 돌아올 수 없을까? 돌아 올 수 없을까? / 못 잊을 건 정

정원 - 무작정 걷고 싶어

무작정 걷고싶어 / 정원 무작정 걷고 싶어 고요한 순간에서 / 무작정 걷고 싶어 보고픈 사람이라 밤비 오는 거리를 내 가슴 숨어진 / 그리움을 노래하며 무작정 걷고 싶어 그리운 님이기에 밤비오는 거리를 / 가슴에 간직한 그리움을 부르면서 무작정 걷고 싶어

정원 - 허무한 마음

허무한 마음 / 정원 1966년 전우 작사 - 오민우 작곡 마른 잎이 한잎 두잎 / 떨어지던 지난 가을날 사무치는 그리움만 / 남겨놓고 가버린 사람 다시 또 쓸쓸히 낙엽은 지고 / 찬 서리 기러기 울며 나는데 돌아온단 그 사람은 / 소식 없어 허무한 마음 * 다시 또 쓸쓸히 낙엽은 지고 / 찬 서리 기러기 울며 나는데 돌아온단 그 사람은 / 소식 없어 허무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