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 추억의 LP 여행

순수한 음악적 감성 파격으로 가요계 강타

록 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아마추어적 풋풋한 감성이 짙게 배인 '아니 벌써' 등이 수록된 데뷔 음반은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 변동을 몰고 왔다. 독특한 사운드도 신선했지만, 순수하고 맑은 감수성과 실험정신이 듬뿍 담겨 있었다. 분명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음악이었다. 일본에서도 산울림의 음악만은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해주고 있을 만큼.
산울림은 서울대 농대 71학년인 큰 형 김창완(1954년생), 서울대 농대 75학년인 둘째 김창훈(1956년), 고려대 공대출신 막내 김창익(1958년생)으로 구성된 3형제 라인업이었다.

리더는 큰 형인 김창완. 수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68년 중앙고 시절부터 75년 군대 제대까지 CCR, 아이언 버터플라이, 너바다 등 외국의 록이나 팝에 심취했었다. 국내 가수 중에는 신중현, 김추자, 펄 시스터즈의 노래를 좋아했다. "음악학원에 다닌 적도 없고, 대학교 1학년 때 동네 고물상에서 클래식 기타 교본과 1,500원짜리 세고비아 통기타 2대를 사서 교본의 첫 장에 나오는 D코드를 잡으며 30분 동안 쳤어요. 그 소리가 참 아름다워 음악을 하게 되었지요" 대학 2학년 때 여자 친구에게 헌정하는 소품을 만들기도 했다. 둘째 창훈은 당산중 시절, 음악 선생님을 통해 클래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형의 영향으로 용산고에 진학하면서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잠시 불었다. 대학에서는 서울대 농대 캠퍼스 록 그룹 샌드 패블즈의 5기 멤버가 되어 기타를 연주했다. 타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막내 창익은 처음에 드럼을 살 돈이 없어 노트와 냄비 뚜껑부터 숟가락 통까지 아무거나 두드리며 연습을 했다. 이에 집안에서는 입학 선물로 드럼 세트, 앰프 두 대, 기타 두 대를 사 주었다. 왕십리에 가서 계란 판을 사와서 방에다 붙여 놓고 학교를 마치는 주말마다 모여 연주를 했다. 그들의 집이었던 동작구 흑석2동은 동네가 시끌시끌했다. 기타 사자마자 그 다음날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나서 처음 완성한 곡이 ‘왜 가’. 이들은 데뷔하기 전까지 유명 그룹의 곡을 카피하기보다는, 특이하게도 100곡 정도를 스스로 작곡해 연주를 했다.

최초의 대학가요제인 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 그랑프리는 서울대 농대의 록 그룹 샌드 페블스 6기가 차지했다. 5기인 산울림의 베이스 주자인 둘째 김창훈은 대상 곡 ‘나 어떡해’의 작곡자였다. 김창완은 "창훈이의 경우 베이스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어 샌드 페블스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 말했다. 1회 MBC 대학가요제의 막후 실력자로 인정되어 그 해 말 데뷔 음반을 발표할 기회를 잡았다. 처음 3형제는 미8군 무대의 파티장에서 '다름이 없다'라는 뜻의 그룹 ‘무이(無異)’로 연주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직업적 음악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들 음악이 수록되어 있는 기념 앨범을 갖고 싶다는 마음 뿐 이었다. 김창완은 대학 졸업 후 은행원이 되려 했다. 헌데 은행 입사 시험 날짜와 레코딩 날짜가 겹쳤다. "취직 시험이야 그 다음이라도 찬스가 있는데 레코딩은 평생에 한번 있을 일 같아서 일단 레코딩을 하기로 하고 은행 시험을 포기했어요. 그 뒤로는 취직 시험을 본 적이 없고 레코딩은 계속하게 되었네요." 1집 녹음은 하루에 다 끝냈다. 처음 한 프로는 기타 줄이 풀리는 바람에 날려 버렸고, 음악 평론가 이백천 씨에게 악기를 빌려 한 프로만에 다 녹음했다. "1집 앨범 녹음은 연습이 다 돼 있어서 눈감고도 하니까 노래만 따로 하고 연주는 한꺼번에 간 거예요." 1집 앨범 표지는 동네 애들이 담 넘어 들어와서 후추 가루 통, 고춧가루 통을 다 열어 놓고 난리를 치는 모습을 생각하며 김창완이 직접 그려 완성했다.

데뷔 시절부터 KBS에서 대상을 받을 때까지 산울림을 키운 숨은 공로자는 서라벌 레코드의 주영철. '산울림'이란 그룹 이름은 이흥주 사장이 지어 주었다. 그는 후에 대성음반을 설립해 김창완을 문예부장으로 스카웃해 실험적인 음반을 많이 발매했다. 데뷔음반이 발표되자 대중은 '괴상한 음악이 나왔다'는 반응 속에 산울림은 스타 그룹으로 떠올랐다. 단 20일 만이었다. 1집은 무려 40만장이 팔려 나가며 한국 록의 새로운 신호탄이 되었다. "처음 여기저기서 우리 노래가 나오고 음반 가게에 우리 판이 걸려있다는 게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음악에 담겨 있는 것은 저의 내밀한 마음인데 그게 주렁주렁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려있다고 느껴져 창피했었지요" 처음 녹음 때 산울림의 악기는 엉성했다. 김창훈의 베이스는 국산 싸구려 기타였고 김창완은 필리핀 밴드가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와서 재활용한 중고 기타를 사용했다. "기타 연例求鳴?줄이 막 풀리고 그랬어요. 양희은씨가 방송국에서 우리 볼 때마다 ‘튜닝 좀 하라’고 했지요." 하지만 파격을 몰고 첫 음반은 아마추어 적인 풋풋한 감성과 타의추종을 불허한 독창적인 창작력으로 신드롬에 가까운 산울림 돌풍을 몰고 왔다.

첫 콘서트는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함장 구자룡 씨가 기획하고 DJ 연합회가 주최한 문화체육관 공연의 메인 게스트였다. 첫 단독 콘서트는 1978년 2월 28일과 3월 1일에 문화체육관 공연. 놀랄 일이 벌어졌다. 장안의 화제가 된 산울림의 공연을 보러 공연장에서부터 덕수궁 앞까지 관객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는 꽃밭이 되었다.

구름팬 몰고다닌 대박행진 록계에 잔잔한 울림 남겨

산울림은 고대, 중대, 경희대, 외대 등 대학에서 라디오 공개 방송과 연계된 공연을 위주로 활동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려대 공연. "공연을 하면서 인산인해라는 걸 처음 봤어요. 고려대 운동장에서 한 시간 정도 공연을 했는데, 그 큰 운동장이 사람의 파도, 사람의 바다로 넘실댔어요" 김창완의 회고다.

데뷔 1년 만에 산울림은 1978년 TBC 가요대상 중창부문상을 수상했다. 1집의 대박에 흥분한 음반사는 2집부터 펜더, 깁슨 기타에 베이스 앰프 등 최고의 장비를 구입해 주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산울림은 2년 동안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내 마음은 황무지’ 등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3집 수록 곡 중 ‘그대는 이미 나'는 실험적인 색채로 중무장한 18분 39초의 롱 버전이었다. "그 노래는 너무 길어, 라디오에서는 곡을 잘라 방송을 했다. 1, 2집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조금 만용이기도 했는데 다시는 그런 건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3집까지의 노래들은 1971-1975년 사이에 만들어진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산울림은 데뷔 앨범 발표 이후 1년 2~3개월 사이에 대략 8장의 음반을 냈다.

79년 1월 TBC <쇼는 즐거워>로 첫 TV출연 후 창훈, 창익 두 동생의 군입대로 팀은 주춤거렸다. 군 입대 전에 녹음해 둔 곡으로 4집을 발매했다. 4집에는 영화, 연극, 드라마 등에 삽입한 음악들이 많이 수록되었다. 이 시기 두 동생은 육군본부 군악대에 입대해 실력을 갈고 닦았다. 5집은 두 동생의 휴가 중에 완성되었다. 또 김창환은 홀로 동요앨범 [개구장이/서라벌, 1979]와 [산 할아버지/대성, 1981]를 만들며 동요적 컨셉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 박동률, 유지연, 김영국 등으로 구성된 고장난 우주선이란 프로젝트팀이 6집 녹음에 참여했다. 81년 군에서 제대한 두 동생의 합류로 재가동된 산울림은 ‘가지 마오’, ‘청춘’ 등을 수록한 7집으로 KBS 가요대상 중창부문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청춘은 애기 돌날에 만든 노래고, 독백은 둘째가 군 생활하면서 초소에서 만든 노래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독백’ 노래만 나오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세요. 다 현실에 뿌리가 있는 노래들이예요." 산울림은 7집 때까지, 서울 스튜디오와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작업을 했다.

81년부터 김창완은 KBS 제3라디오 '11팝스' DJ로 나섰다. 당시 솔로로 대학에 공연하러 다니던 김창완에게 운동권 풍물패들이 꽹과리 치고 전원도 빼놓는 훼방을 받기도 했다. ‘회상’, ‘내게 사랑은 너무 써’ 같은 나긋나긋한 발라드가 들어 있는 8집은 대히트를 기록했지만 대중의 취향을 너무 의식한 앨범이었다. 그래서 9집 때 본래의 음악성을 되살리며 의욕적인 작업을 했다. 반응은 미미했지만 산울림 스스로는 가장 아끼는 앨범이다. 10집은 초창기 산울림 사운드를 구사한, 공식 활동을 접는 사실상 마지막 음반이었다. 김창완은 "산울림은 돈벌이가 안 됐어요. 공연 횟수도 적고 개런티도 비싸지 않았고요. 업소에도 안 섰으니까요. 그때는 업소에 서면 사람이 다 망가지는 줄 알았어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83년, 김창완은 첫 독집 <기타가 있는 수필>을 발표했다. 대성음반에서 록 그룹 로커스트와 형제 그룹 노고지리의 음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또한 최성수, 윤설하, 임지훈, 현희, 신정숙, 허길자 등 유망 신인들을 모아 음악모임 '꾸러기'를 결성했다. 1985년 9월, 이들은 '꾸러기들의 굴뚝여행'이란 이름의 기획 공연을 대학로 파랑새극장에서 1백일 동안 열며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김창완은 동물원의 음반에도 관여했다. "대성시절 프로듀서 하면서 곡도 써주었어요. 노고지리는 민요를 록으로 만든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팀이었는데, 이흥주 사장의 제안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꾸러기랑 동물원도 회사 일로 그냥 한 거예요." 산울림은 국악을 도입해 결합하려는 시도도 여러 번 했다. ‘땅강아지’, ‘청자’, ‘백자’, ‘떠나는 어린이’, ‘무녀’, ‘돌아오려무나’ 등. 이 중 ‘돌아오려무나‘가 제일 파격적이었다. 김창완은 개인적으로 동요집 세 장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

둘째 창훈은 해태상사를 거쳐 87년에는 해태 아메리카로 옮기며 LA로 이주, 한국 CJ의 미국법인인 CJ Foods에서 부사장과 카나다 [주] 앞선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사업 중에도 음악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87년 LA에서 미국인 연주자들과 첫 솔로 앨범을 92년엔 솔로 앨범 <착각>을 발표하기도 했다. 막내 창익은 대우자동차에 입사한 후 현재 카나다 회사의 부사장을 재직하고 있다. 김창완은 90년대부터 연기자로 나서 영화 '정글 스토리'도 출연했고, 드라마 '은실이'에도 출연했다. 96년에는 산울림 전집 8장 CD 박스세트가 지구 레코드에서 발매되어 마니아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97년에는 삼 형제가 다시 모여 예전의 산울림으로 돌아가 13집 <무지개>를 발표해 팬들의 마음을 들뜨게도 했다.

99년에 김종서, 시나위, 윤도현밴드등이 참여해 헌정한 산울림 트리뷰트 앨범은 한국 록 역사상 산울림의 존재가 차지하는 의미를 읽게 해 준다. 산울림은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성과 솔직하고 파격적인 노랫말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견고하게 지키며 그룹 사운드 붐을 주도했다. 산울림은 신중현, 들국화와 함께 한국 록 역사의 삼대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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