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라벨이 [^Signer Story^]인 게시물 표시

남인수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년 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꼬집힌 풋사랑〉, 〈물방아 사랑〉,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라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

김상국 - 추억의 LP 여행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 부산의 명물서 전국구 스타로 60-70년대 연예계의 ‘악동’으로 불린 가수 겸 영화배우 김상국. 진한 허스키 보컬로 ‘불나비’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송아지’등 재즈에서 민요, 동요까지 폭 넓은 레퍼토리를 놀라운 호소력으로 소화했던 그는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울부짖는 듯 했던 그의 노래와 세상 근심을 날려버리듯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코믹은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쇼 무대의 명물’이라 불리게 했다. 그는 뜨거운 열정과 톡톡 튀는 개성으로 대중에게 강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괴물 엔터테이너’였다. 1934년 1월 24일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그는 몸은 왜소했지만 총명했다. 어린시절 그의 보물 1호는 일본군인이 쓰던 찌그러진 신호나팔 악기. 어른들도 놀랠 정도로 나팔을 멋지게 불렀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 그래서 10여명의 동네 개구쟁이들과 모여 ‘만주로 달아나자’는 엉뚱한 모의를 하고 잡혔을 때를 위해 일본 헌병을 칼로 찔러 죽이는 연습까지 했을 정도. 경남중학에 입학하던 해에 지나가는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어른들이 부르는 도라지타령에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을 맞았다. 경남중학 밴드부에 들어간 그는 드럼, 트럼펫, 알토 색스폰 등 다양한 악기를 접했다. 끼가 많았던 그는 기계체조와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도 곧 잘 했고 특히 영어성적이 뛰어났었다. 중학 4학년 때인 16살 때, 6.26전쟁이 터졌다. 당시 부산 범일동 그의 집 앞 사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탱크를 앞세운 미군들의 행군 대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다녔다. 어느 날, 친구들과 거리에 나가 구경을 하던 중 미군 탱크가 김상국 앞에 멈춰서 길을 물어왔다.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주저 없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지 미군은 그를 탱크에 싣고 미군부대로 데려갔다. 곧바로 미군부대 나이트클럽으로 인계된 그는 소년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그...

김광석 - 추억의 LP 여행

[주간한국 2004.07.02] 수줍은 듯한 미소가 근사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그는 사실 스타가 될만한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TV 등 주류무대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았지만 발표하는 앨범마다 소리 없이 20~30만장이 팔려나간 언더그라운드 인기 가수였다. ‘ 너무 우울하다’는 이유로한 때는 방송 금지 되었던 그의 노래 ‘ 이등병의 편지’는 1980년대 이후에 군대에 다녀온 젊은 청춘은 한번쯤은 노래했던 그의 대표곡이다. 그는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첫 가수이다.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5살때인 68년에 서울로 올라와 창신 초등학교를 다녔다. 왜소한 체격이라 ‘반토막’, ‘파김치’란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IQ 130의 영특한 아이였다. 76년 경희중에 입학해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를 읽게 되었다. 79년 대광고에 입학해합창단원이 되었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면서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친구에게서선물 받은 민중 가요집 ‘젊은 예수’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이란 노래를부르다가 울었다. “ 당시 우연히 접한 한돌, 김민기씨등의 노래를 듣고감동을 받고 노래 서클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래서 3학년이 된 84년 서울지역대학생의 노래연합서클인 ‘ 연합메아리’의 멤버가 되어 김민기의 ‘ 개똥이’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김민기의 주도로 대학가 노래 운동의 주역들이 규합하여 만든 ‘ 노래를 찾는사람들(노찾사)’의 창단 멤버가 되어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민중 가수가된 것이다. 이후 85년 1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큰 형이 사망해 6개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는 노래 인생을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87년...

[추억의 LP 여행] 유재하

요절한 '가요계의 모차르트' / 클래식을 대중음악에 접목 17년 전인 1987년 11월 1일.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젊은 신인 뮤지션이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가요계의 모차르트’ 로 불리는 요절 가수 유재하다. 사실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의 순수 음악도가 대중 가수로 변신한 것도 특별했다. 그는 사망 3개월 전에 데뷔 음반 ‘ 사랑하기 때문에’ 한 장을 세상에 남겼다. 그는 단 한 장의 음반만으로 “ 대중 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 높였다”는 사후 평가를 이끌어 낸 가수다. 세월이 흐를수록 생존의 아쉬움이 더해가는 싱어 송 라이터 유재하. 그래서 그를 기리는 가요제를 통해 수많은 재능 있는 후배 가수들이 15년이 넘도록 배출되고 있다. 그는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씨와 모친 황영씨 사이에서 3남 3녀중 다섯째로 1962년 6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정 많고 유순한 성품이었던 그는 효자로 알려져 있다. 69년 서울 은석 국민학교를 입학해 75년 삼선중, 78년 대일고를 졸업하고 81년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는 순탄한 성장기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재능이 탁월했던 그는 순수 음악을 전공했지만 대중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 뿐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연주가였을 만큼 다재 다능한 만능 뮤지션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조용필은 그의 대표 곡인 ‘ 사랑하기 때문에’를 먼저 취입했다. 86년에는 김현식이 주도한 록 그룹 ‘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창립에 참여해 잠시 활동을 했다. 대단한 술꾼이었던 그는 김현식과 술 친구로 지내며 음악적 교감을 나누었다. 김현식에게는 ‘ 가리워진 길’, ‘ 그대 내 품에’ 등 2곡을 주었다. 하지만 조용필, 김현식 모두와는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

[추억의 LP 여행] 조용필

이미지
통기타 두 대로 연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 슈퍼 스타 조용필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가수다. 록, 트로트, 포크, 발라드, 댄스, 퓨전, 동요, 민요 등 35년 간 모든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작은 거인이다. 국내 무대를 평정한 그는 '20세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의 넉넉한 농가에서 부친 조경구씨와 모친 김남숙씨의 3남 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둥글둥글 성격이 좋아 '풀빵'으로 불렸다. 송산초등학교에 다니던 10살 때 뒤늦게 찾아온 홍역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을 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팝송이 좋았던 그는 연주 그룹 벤쳐스와 비틀스 음악에 반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2 때 서울 정릉으로 이사를 해 경동중학에 들어갔다. 훗날 국민 배우가 된 안성기는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 경동고에 진학하면서 공부보다는 더욱 음악에 빠져 었다. 3학년 때는 서소문의 대한일보 13층 스카이 라운지에서 대타로 무대에 설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출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길 바랬던 부모님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 음악을 좋아하는 동네 친구 3명과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월세 방을 얻어 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했다. 석 달 동안 열심히 연습했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해 문산의 용주골로 갔다. 이 시절의 1년은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하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팀 해체 후 1969년 와해 직전의 화양 소속 그룹 '화이브 휭거스'에 리드 기타로 들어가 파주군 장파리의 DMZ클럽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당시 주 레퍼토리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히트곡들. 하숙방과 업소에서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들은 노래의 선율을 도화지에다 건반을 그려가며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

[추억의 LP여행] 김정호

이미지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앗겨버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대중들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촉촉히 적셔대는 처연한 멜로디와 노랫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팬들을 얼어붙게한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 그리고 젊은층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랑의 진실' '작은 새' 등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간 김정호의 등장은 가요계의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오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젊은 학생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던 기존의 포크음악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공감대를 형성할만큼 호소력이 강했다. 새마을운동으로 건설열기가 드높은 당시 사회에 '너무 어두운 곡'이라는 이유로 일부 배척도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처절하리만치 슬픈 멜로디는 온나라를 중독시키며 진동했다. 원로작곡가 황문평 조차 '감히 천재로 표현해도 좋다'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김정호의 음악을 안타까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7년이 지났다. 자신의 음악이 세상에 울려퍼지는 달콤한 꿈을 꾸며 음악공부에 하얀밤을 지세우며 몰두했던 김정호. 혼을 담아 기타줄을 튕겨대며 젊음을 불사르던 모습에 음악선배들도 머리를 숙였다. 본명이 조영호인 김정호는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부친 조재영과 모친 박숙자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동일창극단원으로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 교동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김정호는 ...